시무/シム 2020. 10. 18. 21:28


완전히 쉬는 날, 다시 말해 알바도 학교도 없고 전날 술을 너무 많이 퍼 마셔 나가 돌아다닐 기운이 없는 날에는 그동안 밀린 일을 한다. 빨래, 청소, 설거지, 요리 해두기. 그러다 틈틈이, 혹은 하나가 끝나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게임을 한다. 오늘은 문득 생각이 들어 야구용품을 정리했다. 빨아놨던 배팅 글러브를 개어 도구가방에 넣어둔다. 글러브가 눈에 들어왔다.

벌써 10여년 전은 된 것 같은데, 한국 야구대표팀이 선전하던 시절 아직 꼬꼬마 국가주의자 였던 나는 이 흐름에 야구에 더욱 더 열광했다(참고로 롯데 야구를 이미 이전부터 보고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홀로 공을 벽에 던지고 놀다 리틀야구팀 코치가 연습이라도 같이 해보자고 권유한 적도 있다. 솜씨가 있다며 팀에 가입 해보라고도 했지만, 나는 야구를 돈 내고 배우고 장비까지 다 차려서 부모님이 시합에 데려다주고 보러 와주고 할 정도로 여유있는 집 자식은 아니었다.

그러다 좀 더 커서는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을 모아 캐치볼을 하고 가끔은 시합도 하고 인원이 안 맞다가 가끔은 운동장에 놀러오는 20-30대는 되어 보이는 형누님네들과 시합을 하고는 했다. 그 사람들은 봐준 것인지 어떤건지는 모르겠는데 초중학생 상대로 썩 잘하지는 못했다. 휴일이면 그렇게 새까맣게 탈 때까지 마음껏 뛰고 던지고 잡고 쳐내고, 그러다 집에 돌아오고는 했다.

글러브를 그 때 처음 제대로 된 것을 샀다. 서울이 워낙 재개발이다 뭐다 사람을 못 살게 굴어 지금은 모르겠지만, 당시 동대문운동장이 있었던 근처에는 스포츠 용품점이 참으로 많았다. 야구용품만 다루는 곳도 수두룩 했다. 그 중 한군데를 갔는데,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비싼 용품도 많았다. 개중에는 선수가 쓰는 모델의 레플리카도 있고는 했다. 그러다 메이커도 모르고 가격은 훨씬 싼 글러브 진열대가 있길래 물어보니, 전문 메이커와 같은 공장에서 남은 재료로 생산하는데 메이커만 안 붙이고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10만원 언저리 하던가. 꼬꼬마에게는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지만 아무튼 샀다. 고등학교 들어갈 즈음까지는 이 까만 글러브를 아주 껴안고 살았다. 주말마다 집어들고 야구하러 가는 것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체육시간이 있는 날이거나 하면 틈새 시간을 이용해 친구들과 캐치볼을 하고는 했다. 그러다 고등학교 들어가서 부터 대학 이후까지는 전혀 야구를 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유학을 오게 된 작년 여름 잠시 서울 집에 돌아갔을 때, 가져가면 야구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 싶었고, 인터넷을 통해 야구 동호회에 들어갔다. 한국의 몇배는 많은 야구인구와 운동장 개수를 갖추었기 때문에 간단한 일이었다. 그 후로 매 주말까지는 아니더라도, 코로나 와중에도 불구하고 모이는 날이 잡히면 야구를 하고 있다. 이제는 예전의 감각이 어느 정도는 돌아왔다 싶다. 오늘 깨끗하게 가죽 관리 오일을 발라주고 싹싹 닦아서 말려놓은 이 글러브는 내가 야구를 처음 알고 사랑하게 되었고 바쁘다는 이유로 잊고 살다 다시금 운동 삼아 시작한 이 10여년의 세월을 함께 했다.

퍼포먼스로 유명했던 전 야구선수 신조 츠요시(新庄剛志)가 현역 당시 방송에 나왔던 영상을 본 일이 있다. 야구 얘기를 하던 차에 신조가 들고 나온 글러브는 선수들이 왕왕 쓰고는 하는 유명 브랜드의 최고급 재료로 섬세하게 만들어진 글러브가 아닌, 다 떨어져가는 20년 가까이 썼다는 글러브였다. 무엇보다도 신조는 타격 면에서는 우수한 선수로 평가받기 어려운 선수였으나 메이저리그에 갈 정도로 때가 되면 판을 뒤집는 승부사 기질과 수비 센스 하나는 제대로 평가받은 선수였다. 야구를 하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글러브는 새로 샀을 당시 뻣뻣하기 때문에 길들여가며 쓴다는 것 정도는 알지만, 2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신조의 글러브는 그의 손과 몸에 최적화 되어 있었다. 세월을 받아 들여가며 좋은 것을 익혀온 것이다.

물론 나는 야구선수는 더더욱 아니고 딱히 연구를 하고 몸을 만들고 할 정도로 야구 하나만 보고 사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세월을 보내며 그 것을 몸으로 느껴온 경험해가는 방식을 내 삶에 잘 녹여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된다. 요즘 유난히 비를 맞아가며, 흙먼지를 맞아가며 고생해준 글러브를 쓰다듬으며 든 생각이다.